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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워우먼… 1세대 패션디자이너 ‘최경자’와 ‘노라노’

서울공예박물관서 ‘의·표·예, 입고 꾸미기 위한 공예’ 특별전 진행

1세대 대표 디자이너 작품 전시...한국 여성 패션 현대화에 기여

서울공예박물관은 1세대 패션디자이너가 만든 의상을 주제로 ‘衣·表·藝(의·표·예), 입고 꾸미기 위한 공예’ 특별전을 열었다. 패션 불모지나 다름없던 20세기 초중반 우리나라에서 활동한 1세대 패션디자이너 최경자, 노라노, 앙드레 김이 만든 의상 작품을 한자리에서 만나 볼 수 있는 전시다.

전시에서는 국내에서 처음으로 패션쇼를 연 노라노(95)가 만든 웨딩드레스, 앙드레 김의 스승이자 국내 최초 패션전문교육기관을 만든 최경자의 이브닝코트 등 의상 작품 35벌과 옷본·드로잉·견본 등 20여 점이 소개된다. 디자이너의 의상만 전시하는 것을 넘어 패션과 공예 사이의 접점을 모색해 기법을 보는 재미를 더했다. -편집자 주-

서울공예박물관 이승해 학예연구사는 본지에 “사람들이 생각하는 공예 요소는 장식적이고 기술적인 것인데 옷은 입었을 때 편안한 것이 기술적인 것이다.

눈으로만 보면 공예와 디자인 사이에 선을 그을 수도 있지만 전시를 통해 일상과 함께하는 옷이 공예와 왜 연결될 수밖에 없는지 순서대로 나열해서 이해를 돕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번 전시의 주요 작품을 만든 디자이너들의 공통점은 한국 패션 현대화의 격동기인 1940년대, 전환기인 50년대, 기성복 시대가 열리던 60년대와 70년대 여성 패션의 기틀을 만든 제1세대 패션디자이너라는 점이다.

아울러 양장점을 했고 여전히 그 맥이 이어져 오고 있다는 공통점도 있다. 앙드레김과 노라노는 여전히 브랜드가 남아 있고 최경자는 그의 밑에서 수학한 수많은 디자이너가 브랜드를 갖고 있다.

사진1

<사진설명> 딸 신혜순 전 한국현대의상박물관장과 함께 있는 모습(서울공예박물관)

◇ 한국 패션계의 대모 최경자...패션 불모지 한국에 틔운 싹

최경자(1911~2010) 선생은 우리나라 패션의 도입부에 서 있는 인물이다. 한국에 아직 디자이너라는 호칭도 없던 시절 국내에 ‘패션’의 싹을 틔워 ‘한국 패션산업의 선구자’, ‘한국 패션계의 대모’로 불린다. 디자이너로서의 DNA와 5만여 명의 제자를 키워낸 교육자 DNA가 공존하는 인물이다.

1911년 함경남도 안변에서 태어난 최경자 선생은 일본 무사시노 음대를 수료하고 도쿄 오차노미즈 양장전문학교에서 패션을 공부하면서 패션과 연을 맺었다. 귀국 후 1937년 함흥에 여성 전용 양장점 ‘은좌옥’을 열었다.

여성용 양장은 남성용 슈트를 제작하는 양복점에서나 제작되던 때였다. 이듬해 국제복장학원의 전신인 함흥양재전문학원을 세워 처음으로 패션교육을 시작했다.

1948년 가족과 남한에 내려와서는 국제양장전문학원을 설립하고 6·25전쟁이 끝난 1954년 명동 한복판에 ‘국제양장사’를 차렸다. 이곳은 김지미, 윤인자, 김 씨스터즈 등 당대 스타였던 연예인들의 단골가게이기도 했다. 1957년 10월에는 반도호텔 다이나스티룸에서 첫 번째 패션쇼를 열었다.

1961년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패션스쿨인 국제복장학원(현 국제패션디자인학원)을 세우고 후학 양성에 힘썼다. 국제복장학원은 앙드레 김, 진태옥, 이상봉, 이신우 등 국내 패션계를 이끄는 디자이너들을 배출하며 한국 패션산업 발전에 큰 영향을 끼쳤다.

교육뿐만 아니라 패션계 인사 간 교류를 통한 상생에도 신경을 썼다. 1955년 ‘대한복식연우회’를 창설해 제1세대 디자이너 그룹의 리더로, 1961년 한국 최초의 패션디자이너 모임 ‘대한복식디자이너협회’의 창립원으로 활동했다.

이밖에 국내 최초로 1961년 스타일화과 창설, 1964년 패션모델 양성기관인 국제차밍스쿨 설립, 1968년 국내 첫 패션월간지 ‘의상계’ 창간 등 한국 패션 발전을 위해 곳곳에 길을 열어뒀다. 1976년 한국여성경제인협회의 전신인 한국여성실업인회를 만들고 초대회장을 맡기도 했다.

이승해 학예연구사는 “최경자 선생은 디자이너로서의 선구자 역할과 함께 말 그대로 수많은 디자이너를 키워낸 교육자로서의 역할이 크다. 앙드레 김 선생이 그의 첫 제자로서 세계에 한국 패션을 알리는 역할을 했다. 이번 전시에서는 두 디자이너의 작품에 들어간 공예 요소를 보는 재미가 클 것”이라고 말했다.

이승해 학예사는 “최경자 선생은 옷 만드는 걸 좋아하면서도 굳이 둘 중 하나를 골라야 한다면 교육자의 길을 걷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디자이너로 일하면 본인 하나로 끝나지만 후학을 키우면 모든 사람이 디자인을 할 수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교육자로서 인재를 양성하고 싶다는 마음이 컸던 분”이라고 설명했다.

◇ 국내 최초로 패션쇼를 연 노라노...원했던 건 여성들의 사회적 진출

사진

<사진설명> 노라노 선생은 최초의 해외 유학파로 국내 최초로 패션쇼를 개최하고 최초의 디자이너 기성복을 생산한 디자이너다. 여성들의 사회적 진출을 돕기 위해서 활동성 좋은 옷을 만들어 '한국의 코코샤넬'로 불렸다. (서울공예박물관)

최경자 선생과 함께 1세대 패션디자이너로 손꼽히는 인물인 노라노 선생은 최초의 해외 유학파 디자이너, 1956년 국내 최초 패션쇼 개최, 1963년 최초의 디자이너 기성복 생산, 1974년 한국 브랜드 최초의 미국백화점 입점 등 역시 이름 앞에 수많은 ‘최초’가 붙는 디자이너다.

“나는 옷을 통해 여성의 몸의 움직임을 바꾸고, 생각을 바꾸고, 자존심을 갖게끔 노력했다.”

한국의 코코 샤넬로 불리는 노라노 선생은 여성의 사회 진출을 돕는 옷들을 만들었다. 그는 윤복희의 미니스커트와 펄시스터즈의 나팔바지를 스타일링한 장본인이기도 하다. 엄앵란, 사미자, 윤소정, 정혜선 등 당대 유명 스타는 물론 수많은 사람이 그의 옷을 사랑했다.

노라노 선생은 일제강점기였던 1928년 3월 서울 종로구 내수동에서 차녀로 태어났다. 경기여고를 졸업하고 스무 살이 되던 1947년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그 사이 1944년 군수공장과 정신대로 끌려가는 징집을 피하기 위해 서둘러 결혼을 택했지만 2년 여 만에 이혼을 하면서 ‘패션디자이너’의 길을 걷기로 했다. 한국 여성으로는 두 번째 비행기 승객으로 미국으로 건너간 그는 프랭크 왜건 테크니컬 칼리지를 졸업하고 귀국했다.

1949년 한국으로 돌아온 그는 6·25전쟁 중 피난지였던 부산에서 쇼 의상을 만들었다. 1952년에는 서울 명동에 의상실 ‘노라노의 집’을 개업했다. 이후 파리 ‘아카데미 줄리앙 아트스쿨’에서 수학하고 1956년 서울 반도호텔에서 한국 최초의 패션쇼를 열었다. 1966년에는 백화점에 기성복 코너를 열면서 최초의 기성복 패션쇼를 열었다.

이후 파리와 미국, 일본을 오가며 한국 패션을 세계에 알리고 한국산 실크로 세계시장을 개척했다. 1973년 국산 견직물 컬렉션으로 파리 프레타포르테에 진출했고, 1979년 뉴욕 맨해튼 7번가의 패션 거리에 노라노라는 간판을 걸었다.

그는 첫 패션쇼를 열 때부터 국내에서 생산한 옷감을 사용하겠다는 기준이 명확했다. 첫 쇼에서 고려모직과 모직물을 개발했고 이후에도 면직물, 견직물 등 소재 개발을 병행하면서 옷을 만들어왔다.

그는 60년 넘게 자신의 의상실을 운영하면서 매 계절 빠짐없이 패션쇼를 한 성실한 디자이너이기도 했다. ‘일벌레’로 불릴 만큼 열정적으로 옷을 만들던 그는 10여 년 전 60주년 회고전을 열고 이를 기념하기도 했다.

그의 본명은 노명자였다. ‘노라’는 미국에 도착한 그가 선택한 영어 이름이다. 학창 시절 읽었던 입센의 희곡 ‘인형의 집’에서 주인공 ‘노라’가 ‘나에게는 나 자신에 대한 의무가 있어요’라는 말과 함께 집을 떠나 자신의 인생을 찾았듯 그 역시 ‘노라’라는 이름을 가지고 새 인생을 찾아 나선 것이다. 아내, 며느리, 엄마, 딸이라는 역할이 아닌 ‘나로서 존재하는 나’를 선택한 셈이다.

이승해 학예사는 “노라노 선생은 여성의 활동성이나 편안함을 강조했다. 옷을 보다 편안하게 입을 수 있는 패턴이나 프린트 쪽으로 개발을 많이 했다. 초창기에는 웨딩드레스가 많지만 후반부에는 기성복이 많다. 미국은 우리나라보다 기성복이 빨리 시작됐는데 노라노 선생도 미국에서 공부하면서 실용성을 배워 와 여러 사람이 입을 수 있는 옷에 대한 고민을 많이 했던 것 같다. 70~80년대로 넘어가면 더 심플해지는 특성이 보인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국내 패션업계는 학원 라인에 따라서 협회를 만들고 구분되는 분위기가 있는데 학원 출신이 아닌 미국 유학을 통해서 패션을 배운 노라노 선생은 그 어디에도 들어가지 않고 결이 다르게 간 것 같다. 혼자만의 길을 걸었던 그가 진짜 원했던 건 여성들의 사회적 진출을 돕는 것이었다. 그래서 활동성 좋은 옷이 만들어졌던 것 같다”고 덧붙였다.

<기사제공 : 우먼타임스 곽은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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